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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품은 마음 그대로, 서민의 따뜻한 친구 인재근 국회의원

  • 수정일 2019-04-13 14:42
  • 조회수 4,123
김근태의 ‘바깥사람’ 인재근이 김근태의 몫까지 해내려 합니다.
참여해서 올바른 권력을 세우는 길에 함께 해주세요.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년시절을 섬 아이로 자라다가 초․중․고등학교는 인천에서 다녔습니다. 1973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했습니다. 여름방학 땐 주로 농활을 다녔습니다. 겨울방학 땐 구로공단에서 일하거나 중랑천 빈민판자촌에서 야학을 꾸렸습니다. 공장의 열악한 환경을 비롯해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과 맞닥뜨리기 시작했고, 이 무렵부터 노동운동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1977년 졸업 후, 노동운동을 위해 공원이 1,300명가량 되는 규모의 부평 소재 봉제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위장 취업’이었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성실하게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학교 선배의 집에서 남편이자 평생 동지인 김근태를 처음 만났습니다. 김근태의 첫 인상은 수배중이어서 그런지 많이 지쳐 보였습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반면 김근태는 인재근의 첫 인상에서 ‘어두운 시대를 날려버릴 듯한 명랑하고 쾌활한 웃음’을 봤다고 합니다. 결혼식은 두 번 치렀습니다. 첫 번째는 1978년이었습니다. 당시 둘은 도피 중이었고, 그 때문에 인천 부평의 설렁탕집에서 처가 식구들만 모여 나눈 식사자리가 결혼식을 대체했습니다. 이후 1979년 10·26과 함께 수배가 해제됐고, 1980년 4월 26일, 대학로 흥사단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 후 1987년까지 민주화투사로 불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1987년까지의 인재근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1979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노동상담간사, 1983년 카톨릭 노동청년회 25년사 집필, 1985년 1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총무, 1987년 6월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공동수상 등 입니다.이땐 정말 열정적으로 민주주의만 보고 살았습니다. 특히 남편 김근태의 고문을 겪으며 독재에 대한 투쟁과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입을 열면 피를 토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남편을 대신해 활발한 외부활동을 해서 ‘김근태의 바깥사람’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무렵입니다.1987년 민주화가 이뤄졌고, 이후 남편인 김근태가 도봉구의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민주화 투사 인재근’의 삶은 일단락되었고, 대신 ‘정치인의 아내’와 ‘도봉 주민’으로서 새로운 삶의 막이 올랐습니다. 인재근에게 도봉은 고향 그 이상입니다. 김근태와 함께 실제로 30년 넘게 살아왔고 자식 내외와 손주들도 전부 도봉에 살고 있습니다.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 앞의 미용실을 가고, 인근의 초안산을 오르고, 그러다 주민들을 만나면 인사를 나누고, 수다를 떨고…. 도봉의 모든 활동이 곧 인재근의 삶이었습니다. 김근태가 중앙정치 때문에 바쁠 때도, 인재근은 도봉을 지켰습니다. 여의도 바깥일, 특히 도봉에 관한 일은 오롯이 인재근의 몫이었습니다. 시대와 장소만 바뀌었을 뿐 인재근은 어쩔 수 없는 김근태의 바깥사람이었습니다.
2011년 12월, 남편이자 동지인 김근태가 하늘로 떠났습니다. 장례식에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와 위로해주셨습니다. 오히려 위로를 받고 가실 정도로 슬퍼해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김근태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김근태의 49제 무렵, 총선이 두 달 남았을 때였습니다. 김근태를 지지해줬던 많은 분들이 김근태를 이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지역의 지지자들께서 도봉 출마를 너무나 간절하게 요구하셨습니다.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김근태가 인재근의 운명이었듯, 정치 역시 피할 수 없는 인재근의 숙명이었습니다.2012년 4월, 제19대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의 ‘전략공천 제1호’로 도봉(갑)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섬 아이로 자라 노동운동가를 꿈꿨던 열혈 민주화 투사는 ‘정치인의 아내’에서 현실정치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이 김근태의 삶과 뜻을 잇게 되었습니다. 김근태와 인재근은 늘 역할분담을 해왔습니다. 김근태가 감옥에 들어가면 인재근이 감옥 밖을 책임졌습니다. 김근태가 중앙정치를 하면 인재근은 지역정치를 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김근태가 하늘의 일을 하고 있으니 인재근은 땅의 일을 도맡아 하는 셈입니다. 현실정치에 뛰어든 이후, 간혹 ‘김근태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 않냐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김근태의 아내’라는 말은 인재근의 자부심입니다. 오히려 부담은 ‘김근태의 아내’가 아닌 ‘인재근의 남편’입니다. 하늘나라의 김근태가 ‘인재근의 남편’이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도록 열심히 정치하고, 열심히 살고자 합니다.
“서민의 따뜻한 친구가 되겠습니다.”2012년 4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 당시 내걸었던 슬로건입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민생, 복지 관련 지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고, 서민의 삶을 짓누르는 아픔 또한 꼭 그만큼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곁에서 그들의 손을 잡아줘야 했습니다. ‘서민의 따뜻한 친구’가 되겠다는 약속은 현실정치를 시작하며 스스로 정한 삶의 방향이자 초심이었고, 이정표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이정표를 따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정활동에 매진해왔고, 소외계층을 챙기는 따뜻한 정치를 펼치려 무던히 노력해왔습니다. 국회의원 연구단체인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를 창립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수많은 민생법안을 연구하고, 발의했습니다. 평화가 흔들리면 서민의 삶부터 흔들린다는 마음으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활약했고, 우리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인권과 복지를 챙기기 위해 여성가족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활동했습니다. 현재는 일선 행정현장과 주민의 안전을 돌보기 위해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엔 아직도 어렵게 살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세계 최하위권의 출산율과 OECD 국가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우리 청년들은 ‘헬조선’이라 외치며 아픔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다시, 희망을 말하려 합니다. 김근태가 말했듯이 희망은 힘이 셉니다. 서민의 따뜻한 친구가 되어 함께 손잡고, 희망의 힘으로 일어서려 합니다. 서민의 삶을 챙기는 따뜻한 정치, “인재근의 정치”를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정당 : 더불어민주당
선거구 : 서울 도봉구갑
소속위원회 : 행정안전위원회
당선횟수 : 재선( 19대 , 20대 )

약력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주요경력]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이화여자대학교 민주동우회 회장
민주통합 시민행동 공동대표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총무
제19대 국회의원(외교통일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보건복지위원회)
제20대 국회의원(보건복지위원회 간사)

[현재활동]
(재)김근태재단 이사장
제20대 국회의원(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
국회의원 연구단체 국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연구회' 대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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