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정일
2022-07-14 01:26
-
조회수
1,287
6월 25일 토요일,
사단법인 한국 프레젠터 협회 창립 5주년 기념파티에서 만나 뵙게 된 인연으로,
한번 밖에 뵙지 못했으나 그날 창립 축하 연설 1번 듣고
역시 베이비부머 로서 '사회부모'로서 울림 있으면서도 해학이 느껴지는
축하연설이었다.
그날 내가 조재천 회장님께 들은 말씀 중 한가지 기억하는 것은 이거였다.
스피치 한말씀 해달라고 김효석 박사님께 요청을 받으시고
스피치 하실때 떨릴때 어떻게 하냐는 질문에
" 아쉬울게 없어서 떨리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내가 이자리에 여러분께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기에
본인은 떨리지 않는다고 운을 떼시며 호탕하게 말씀을
이어가셨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브랜드'에 관한 말씀이셨다.
브랜드가 뭐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 브랜드는 남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에 무릎을 탁 쳤다 .
그래 이거지.
나도 누군가에게 브랜드가 되고싶다.
나도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였다.
‐‐------------------------------------------------------
인키움 조재천 회장님을 언론 인터뷰에서 찾아본다.
2020.12.14
일요주간 인터뷰
코로나 정국이 1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최근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층 강화되면서 일상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고 있다. 올해를 마무리하면서 본인에게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 사람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두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심3일’이라는 ‘내 탓’이고, 다른 하나는 무엇 때문이라는 ‘남 탓’일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게 만든 ‘COVID19’ 덕분에 유튜브를 시작한 후 8분 47초의 영상으로 인해 바뀐 저의 삶을 얘기하려 합니다.
올해 초 COVID는 기업 교육을 업으로 하는 저희 회사에게 특히 심각한 위기로 닥쳐왔습니다. 그 때 저의 인생 멘토께서 10여년 전에 제게 하신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잠실 롯데월드타워는 뭘 팔아서 지었나” “삼성전자는 뭘 팔아서 세계적인 기업이 됐나” 그 답은 1달러 내외의 껌과 반도체였습니다. 바로 싼 제품, 더 나아가 공짜를 파는 기업이 시장을 지배할 미래를 일러준 질문이었고 지금 현실이 됐습니다. 그래서 공짜의 아이콘인 유튜브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유튜브 사업을 주문하고 저도 거의 동시인 3월 18일에 개인 유튜브를 시작했습니다. 유튜브가 뭔지 이해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유튜브의 주제로 세운상가를 택한 것은 개인 공간을 두고 있기도 하거니와 상가의 건축적 가치와 상가를 지켜온 사람들의 스토리를 알려, 세운상가 재생에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튜브를 시작하고 열흘이 지났을 무렵인 3월 29일, 한 청년 가수에게 빠진 집사람을 위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게 됐습니다. ‘김호중에게 아내를 뺏겼어요’라는 8분 47초의 짧은 영상이 제 인생에 있어서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만든 날이 될 줄 몰랐습니다. 이 영상은 지금까지 12만명 이상이 시청했고, 9개월 만에 4만명이 넘는 구독자가 보는 채널로 만들었습니다. 세운상가에서 집사람을 위한 유튜브가 된 결과입니다.
집사람을 위한 영상을 만들다 보니 나름의 규칙이 필요했습니다. 평생을 직장인과 주부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집사람이 알아듣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집사람이 귀 기울일 얘기를 하는 것이며, 셋째는 집사람으로부터 고맙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많은 구독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저를 ‘종로의 선한 글을 나누는 아저씨’로 만들었습니다.
● 조만간 2021년 신년을 맞게 된다. 새로운 변신과 혁신을 거듭 추구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여러분들은 미래가 불확실한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누구를 찾습니까? 저는 1999년 말, 창업을 고민할 때 철학관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운세를 봐주신 선생님이 작은 컵을 보이며 “이게 자네 그릇인데, 많은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하나?”며 물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자, 그는 컵에 물을 채우고 따르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리고는 “차면 비워라. 작은 양이지만 죽어가는 이에겐 생명수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채워라.”는 저의 인생철학이 된 답을 얘기했습니다.
제가 맨 먼저 컵을 비운 것이 직원들을 공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석, 박사 인력을 육성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예상치 못했던 일자리 창출 대통령상을 받고 난 뒤부터 청년들의 멘토로서 활동한 것이 제가 비운 두 번째 컵이 됐습니다.
수천 명의 청년들을 만났고 지금도 10여 명의 청년들과는 청년시절의 꿈을 다시 피운다는 뜻의 ‘리-피움’이란 이름으로 매월 정기 조찬회를 가지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각자의 분야에서 리더가 된 그 청년들에게 거꾸로 배울 수 있어 행복합니다.
요즘 저는 세 번째 컵을 비우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유튜브에는 ‘끝까지 보기’ 운동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게 저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수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세운상가의 장인들에게 임대료를 지원하는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상가는 쇠퇴했더라도 기술은 남기는데 도움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지원 금액이 초라하지만 저의 ‘Do first’로는 괜찮은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 비대면 사회라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는 사회인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경쟁력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튜브가 좋은 사례입니다.
● 오랫동안 코로나 지속으로 관련 스트레스가 심각하다.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지!
▼ 태어나서 자신의 꿈을 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한 계획대로 살았다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저는 지금까지 매일 앞에 닥친 것을 해결하기에도 부족해 꿈을 말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삶을 ‘Do First, Dream Next’란 책으로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이던 때 심한 말더듬이였습니다. 그 때 담임 선생님께서 저를 교내 웅변대회에 반대표로 내보내셨습니다. 그 때가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는 제 인생의 첫 ‘Do First’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선생님 덕분에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더듬이를 고치게 됐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 저희 집은 넉넉한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장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학생회장에 출마해야 했던 것도 ‘Do First’였습니다.
1996년 저는 한참 일 할 시기, 망막박리증으로 실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48일간 눈에 붕대를 감은 채 꼼짝할 수 없었지만, 12년 만에 처음 가진 휴식이었습니다. 그 때 직장생활에서 배운 것들을 모아 ‘신세대 직장인 50훈’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게 제 인생의 큰 선물이 됐고 인세 전액을 회사에 사회공헌기금으로 기부했습니다. 직장에서 배운 것이기에 회사를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인키움을 창업한 10년 뒤, 교육회사로서는 중견기업이 되었으나 우수한 인재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11년 4월부터 두 달간 ‘바보를 찾습니다’라는 샌드위치 간판을 목에 걸고 전국 대학의 정문 앞에 섰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자리 창출 대통령상’을 받게 됐고, 그 해 입사 경쟁률 93대 1로 주목받는 회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세운상가를 위해 시작한 유튜브가 집사람을 위한 유튜브로 바뀌었으나 그것이 세운상가에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게 저의 꿈꾸지 않았지만 꿈같은 현실이 온 얘기입니다.
이제 제 나이 60이 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꿈을 얘기하기에는 많이 늦은 나이가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제겐 하루에 150번의 8분 47초가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저의 ‘Do First’는 매일 계속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