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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일
2018-07-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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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9년(인조 17)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배하고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은 후 청의 강요에 따라 세운 공덕비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전체 높이 5.7m,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쪽 면에는 한문, 다른쪽 면에는 만주문(滿洲文)·몽골문으로 번역되어, 비석 하나에 3개국 문자를 사용하였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졌으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1895년(고종 32) 매몰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에 의해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우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고증을 거쳐 최초의 위치인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졌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