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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 수정일 2018-07-10 20:24
  • 조회수 1,752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0만 3375㎡이다. 아차산에 있는 이 산성은 아단성(阿旦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이라고도 한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서쪽·남쪽에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쌓은 듯한데,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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